푸른여우의 영화 이야기 189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당신이 이 남자의 연기를 본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화상의 트로피를 그의 발 밑에 던지고 싶을 것이다. 영화가 올림픽경기라면 그에게 아낌없이 금메달을 주겠다.” 연기자로서 이런 극찬을 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칭찬엔 인색하기로 소문난 뉴욕타임스의 영화평론가들로부터 이처럼 최상의 격찬을 받은 주인공은 바로 미국배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사진)입니다. 미국 현대소설가 트루먼 카포테(1924~1984)의 일생을 그린 영화 ‘카포테’에서 그는 명불허전의 탁월한 연기로 평론가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합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논픽션 ‘인 콜드블러드’ 등 걸작 소설들을 남긴 카포테의 치열한 강박관념과 이기적 천재성, 그리고 동성애자로서의 갈등까지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표현해냈다는 ..

패트리샤 클라크슨

‘스테이션 에이전트’는 난장이 핀이 작은 시골 마을의 낡은 간이역 역사로 흘러들어오면서 시작되는 영화입니다.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채 방치된 이 곳에서 살면서 핀은 난생처음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놓는 법을 서서히 배우게 되지요. 이 마을에는 남편과 별거해 홀로 사는 아마추어 화가 올리비아란 여성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의 어수선한 행동때문에 신경이 거슬렸던 핀은 올리비아가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후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채 자신보다 더 황폐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정쩡한 40대 초반의 나이에 아들의 죽음과 파탄난 결혼의 상처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여자의 아픔이 생생하게 가슴에 와닿은 것은 패트리샤 클라크슨(47)이란 배우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클라크슨이란 ..

샘 셰퍼드

‘돈 컴 노킹’의 주인공 하워드는 한물간 서부영화 배우입니다. 술과 마약, 그리고 여자 때문에 인생을 망친 전형적인 인물이지요. 어느날 영화 촬영 도중 덜컥 도주해 무작정 몇십년만에 찾아간 어머니로부터 그는 자신에게 아들 한명이 있다는 천청벽력같은 말을 듣게 됩니다. 몬태나주의 작은 마을에서 그는 평생 한번도 얼굴을 본적이 없었던 아들은 물론이고 딸까지 만나게 되지요. 자신을 향해 온갖 물건을 내던지며 화를 내는 아들과 ,아버지를 너무나 그리워해왔다고 털어놓는 딸을 바라보며 온갖 복잡한 심경이 엇갈리던 하워드의 얼굴, 그리고 아무말 없이 자식을 품에 안던 그의 구부정한 어깨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을 울리는 장면입니다. ‘돈 컴 노킹’에서 샘 셰퍼드(63)가 없었다면 , 하워드의 고독하고 허무한 내면이 ..

이자벨 위페르

#1여자는 비엔나 음악학교의 저명한 피아노 선생님이다. 그녀는 무대 한켠에 서서 여제자가 독주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학생은 엄격한 선생 앞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있다. 이때 동료 남학생 한명이 악보를 넘겨주겠다며 무대위로 올라간다. 남자는 몇마디로 여학생을 웃기고, 덕분에 긴장이 풀어진 그녀는 평소보다 눈에 띄게 좋아진 연주실력을 발휘한다. 이 모든 것을 선생은 조용히 무대 밖으로 나가 탈의실로 들어간다. 잠깐 황망한 시선과 동작으로 옷들 사이를 걸어다니던 선생은 여학생의 코트를 찾아내고 , 유리잔 하나를 깨서 코트 주머니에 넣는다. 결국 연주를 마친 학생은 유리조각에 손을 다친다. #2남자제자를 향한 사랑을 거절당한 선생은 겹겹의 문을 헤치고 연주홀 밖으로 걸어 나온다. 그녀의 지갑에는 ..

제레미 아이언스

[데미지]의 마지막 장면, 기억나시나요? 북아프리카로 추정되는 낯선 도시에서 허름한 옷을 걸친 남자주인공이 한 손에 간단한 음식이 담긴 듯한 봉지를 들고 걸어가던 모습. 왠일인지 낡은 가죽 샌들을 걸친 그의 맨발이 아직도 유난히 강렬하게 기억나네요. 한때 존경받던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이제 맨발에 낡은 옷을 걸친채 외국을 떠도는 방랑객 신세가 되어 있습니다. 인생 전체를 걸었던 사랑과 욕망이 모두 지나간 뒤 , 허허롭게 홀로 남은 그의 삶은 과연 파괴된 것일까요 , 아니면 자유로워진 것일까요. [레이디스 앤 젠틀맨]에서 이전보다 좀더 나이들고, 좀더 마른 제레미 아이언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10년전 [데미지] 마지막 장면에서의 그를 떠올리게 만들더군요. 제레미 아이언스는 제가 본격적으로 영화를 챙겨보기 시..

줄리안 무어

줄리안 무어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아마도 ″할리우드에서 가장 용감한 여배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60년생이니 올해 나이 48세. 인형같은 외모(제눈엔 무척 예뻐보이지만) 가 아닌데다가, 30대가 돼서야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니 꽃같은 어린 나이도 아닙니다. 게다가 두 아이의 엄마이죠( 수전 서랜든, 골디 혼처럼 인생의 파트너는 있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무어가 용감한 이유는 첫째,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벗는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엉덩이나 가슴 노출 수위를 놓고 온갖 구실과 조건을 내거는 여배우들과 달리 무어는 감독이 요구하면, 아니 작품이 요구하면 용감하게 옷을 벗는 배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가 아직 국내 팬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시절에 출연했던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숏컷]..

크리스토퍼 워큰

누구나 인생에서 영원히 잊지못할 영화 한장면이 있을 겁니다. 제 경우엔 그게 지나치게 다종다양하다는게 문제이긴한데, 그래도 그중 톱 5를 차지할 만한 것을 골라본다면 바로 마이클 치미노의 디어헌터의 러시안 룰렛 장면입니다. 78년작이니까 제가 고등학교 재학중이던 소싯적의 영화군요. 사실 이 영화에는 기억나는 장면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펜실바니아의 작은 철강도시에 형성된 러시아 이주민 커뮤니티가 흥미로웠고, 추운 겨울날 친구들이 사슴사냥을 하는 장면,영화 초반부의 흥겨운 러시아식 결혼식도 생각나네요. 무엇보다 배우들이 인상깊었는데, 진중한 이미지의 로버트 드 니로부터 그를 감싸안는 지적인 여성으로 등장한 메릴 스트립, 섬약한 감성의 소유자를 연기한 존 새비지, 그리고 크리스토퍼 워큰 등 휼륭한 연기자..

수전 서랜든

이라크전쟁이 한창이던 해에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파인 여배우 수전 서랜든이 [데드맨 워킹]으로 받은 오스카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팔아먹으려다가 아카데미와 마찰을 빚은 적이 있었습니다. 트로피를 엿바꿔먹으려던 것이었냐고요? 물론 아닙니다. 트로피를 경매에 붙여서 얻은 수익으로 전쟁 구호기금으로 사용하려 했던 것이죠. 아카데미는 펄쩍 뛰었습니다. 감히 오스카 트로피를 상품으로 내놓다니 , 무엄하기 짝이 없다는 거죠. 서랜든은 이에 대해 ″한번 준 트로피를 가지고 왜 아카데미가 이래라 저래라 하냐″며 보수적인 아카데미를 신랄하게 성토했구요. 후속기사가 없어서 트로피의 행방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서랜든이 트로피를 팔아먹으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된 듯합니다. 서랜든이 요즘 언론에 거론되는 경우는 대개 정..

장만옥

여자가 여자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릴 수도 있더군요. 몇해전 화양연화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시네코아 극장에서 열린 일반시사회장에서 제 가슴은 순전히 한 여자때문에 쿵쾅거리고 있었습니다. 검은 망사 스타킹에 조금 투박해보이는 구두를 신은 튀는 옷차림을 하고 극장 벽에 무심히 기댄 한 여자때문에... 그녀는 바로 장만옥이었죠. 그녀와 내가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숨쉬고 있다니! 아비정전에서 그녀가 연기했던 수리첸처럼 전 그 짧은 1분이 영원히 기억 속에 남아있을 수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할 수있었답니다. 장만옥이란 이름이 맨 처음 다가온 것은 순전히 왕가위 감독의 열혈남아 때문이었죠. 비가 쏟아지는 밤 부둣가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이 손을 맞잡고 전화 부스로 뛰어들어가 열렬한 키스를 나누던 그 장면! 그리고 그..

샬럿 램플링

예순을 바라보는 여자의 섹스를 아름답게 그릴 수있는 영화감독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프랑스 감독 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랑수아 오종의 2000년작 [사랑의 추억](원제는 [모래 아래(sous le sable)])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을 만큼, 이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의 섹스는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지요. 이 영화의 DVD 서플먼트에는 오종 감독이 장면장면마다 어떻게 연출했는지를 직접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주인공역의 여배우가 수영복 차림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누드 연기도 해야 한다는 점때문에 캐스팅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더군요. 특히 미국이나, 영국의 나이든 여배우들은 젊지 않은 육체를 화면에 드러내야한다는데 모두들 고개를 내저었다고 합니..